본문 바로가기
사진

한국 최초의 사진관

by 바람달빛 2022. 10. 8.
반응형

한국 최초의 사진관, 천연당사진관?


김규진이 천연당 사진관을 처음 개업한 때는 1898년, 1903년, 1907년 등 여러 설이 있다.
1901년 일본에서 출판된 책 일본 풍속 사진첩에 실린 당시 경성의 모습을 소개하는 사진을 보면 한글로 ‘사진관’이라고 쓴 작은 간판이 선명하게 보인다. 사진의 원출처로 추정되는 것은 독일의 지리학자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이 낸 ‘Völkerkunde’(민족학)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1885년에 초판이 나왔으며 마지막 개정판은 1888년에 나왔다.
이 사진 속 사진관이 ‘천연당’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천연당의 설립연도가 1907년도가 아니어야 한다, 1885년 전이어야 타당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천연당사진관 김규진이 아니라면 누가 운영하는 사진관이었을까?

첫 번째 후보자, 황철(1864~1930)로 추측해본다. 황철은 1882년에 중국에서 사진 기재를 사 왔으며 1895년 6월에 포천군수로 부임하기 전까지 경성에서 촬영소, 혹은 사진관을 운영했다고 한다. 또한 같은 시기의 지운영(1852~1935)이나 김용원(1842~1896)도 빼놓을 수 없다. 지운영은 한국인 최초로 고종의 사진을 촬영했고, 김용원은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운 뒤 1883년에 서울 저동에 촬영국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1880년대에 황철, 김용원이나 지운영 같은 선각자들이 사진관을 개설한 적이 있었지만, 일반인을 상대로 영업을 하면서 유명세를 크게 탄 곳은 ‘천연당’이 유일하다. 개업 초창기에 엄청나게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사진관 개설 다음 해인 1908년 음력 정월 한 달 동안에 천여 명 이상의 고객이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사진관을 찾았고, 미처 손님을 다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당시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김규진은 그의 부인 김진애(金眞愛, 본명 김성녀)를 여성사진 촬영을 전담하는 사진사로 고용하여 여성들이 사진관을 찾도록 유도하였다.

천연당사진관을 한국인 최초의 사진관으로 규정하기보다 당시에 한국인이 세운 가장 유명했던 사진관으로 언급하는 것이 타당하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16일자 천연당사진관 개업 광고

대한제국 최초의 사진사, 김규진 화가


김규진 화가(金奎鎭,1868~1933)는 구한말의 서화가이자 대한제국의 황실 전속 사진사였다.
본관은 남평, 호는 해강이며 평안남도 중화군 출신이다.
해강은 1907년 서울 소공동에 '천연당사진관'을 냈다. 근거는 1907년 8월 20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난 개업광고다.  대한매일신보 1908년 3월 4일 자 기사에는 음력 정월 한 달에 일천여 명을 찍었다는 기록이 나오니 당시 가장 유명한 사진관임에 틀림없다.
해강이 1905년 경운궁에서 찍은 고종 황제의 어진(御眞)이 미국에서 발견되어 현재 뉴어크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사절단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서화가로 이미 명성이 있었던 그는 고종황제의 어명으로 왕세자 영친왕 이은의 스승으로 서화를 가르쳤다.
1907년 일본으로 끌려 간 영친왕을 보려 자주 일본을 왕래했다. 이때 사진술을 처음 접했다면 너무 늦는 시점이고, 익힌 알고 있는 바를 향상시키는 단계였을 것이다. 향상된 기술을 천연당에 접목시켜 사진의 품질과 고객의 만족도를 높였을 것이다. 
학계에서는 해강의 동생 김태진(金台鎭)이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갈 때(1904년) 해강도 함께 건너가 사진술을 배운 것으로 추정한다. 또 20대 시절, 중국에 머물 당시 이미 대륙에 보급된 사진술을 경험했을 개연성도 존재한다. 어느 곳에서 사진술을 배웠든 표정과 색채·음영, 원근법에 능한 미술가로서 어렵지 않게 사진술을 익혔을 것이다.
외숙부인 소남 이희수(少南 李喜秀)에게서 글씨를 배우고 18세 때 청나라에 유학을 다녀왔다.
구한말 가장 먼저 단발(斷髮)을 한 조선인으로 알려져 있다.예서·행서·해서·초서 등 각 서체와 그림에 능하였으며, 묵화를 잘 그렸다. 특히 묵죽(墨竹)은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고 서예는 대자(大字)를 잘 써서 오늘날 명승고적과 고루(高樓), 큰 사찰에는 반드시 그의 필적이 남아 있다. 삼보(三寶)사찰인 해인사·송광사·통도사는 물론 건봉사·마곡사·쌍계사·전등사 등지에 그의 글이 걸려 있다. 유작으로 〈묵죽도(墨竹圖)〉, 〈유연도(柳燕圖)〉, 〈월야죽림계류도(月夜竹林溪流圖)〉, 〈왕죽도(王竹圖)〉가 있다.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 새겨진 19m가 넘는 큰 글씨 ‘미륵불(彌勒佛)’과 창덕궁 희정당 벽에 걸린 <만물상 추경> ,<총석정 해경>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한국인에게 사진이란
사진’은 우리 민족 고유의 용어”라고 박주석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말한다. 일본에서도 ‘Photography’를 ‘寫眞’이라 표현하기에 일본으로부터 유래된 말로 알려졌지만 조선시대에 ‘초상화’를 지칭하는 용어가 ‘사진’이었다고 한다. “한국인에게 사진은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외형 묘사뿐 아니라 인격과 내면, 인물의 정신세계까지 표출해야 한다’는 전신사조(傳神寫照)에서 비롯됐다”라고” 얘기한다.
그대로 똑같이 베끼는 ‘사(寫)’에서 사람의 참모습인 ‘진(眞)’을 담아내는 것이 사진을 바라보는 핵심이라고 해석된다.

고려시대 대문장가, 이규보(1168~1241)가 쓴 《동국이상국집》 문집 제19권에 실린 시 <달마대사상찬(達摩大師像贊)>달마대사 초상을 보며 사진(寫眞)이란 말이 나온다. 

달마대사상찬(達摩大師像贊)

면벽소림(面壁小林)  소림사에서 면벽 참선한 것은
욕전심이(欲傳心耳)  마음을 전하자고자 함이었도다
심이전어진단(心已傳於震旦)  마음이 이미 동방에 전해졌으니
장신여형이서의(將身與形而西矣)  몸과 형체를 거느리고 서국(西國)으로 향하리
당기견재(當其見在) 현재에 있어서도
가전자심혜(可傳者心兮)  전할 것은 마음이요
무용자신(無用者身)  쓸데없는 것은 몸이라
신이거의(身已去矣)  몸이 이미 떠났거늘
하필사진(何必寫眞)  어찌 반드시 상을 그려야 하는가
사진구심(寫眞求心)  상을 그려 마음 구하는 것은
약심사태이색주(若尋蛇蛻而索珠)  뱀 허물에서 구슬을 구하는 격이다
왈신왈진(曰身曰眞)  몸이건 상이건
숙유숙무(孰有孰無)  어느 것은 있고 어느 것은 없으리
신시몽중물(身是夢中物)  몸이 꿈속의 물건이라면
진위몽중몽(眞爲夢中夢)  상은 꿈속의 꿈이다
혼혼명명(混混溟溟)  몸과 형체는 까마득히
개귀우무혜(皆歸于無兮) 모두가 모두 무로 돌아가고
유심혜여월장공(唯心兮與月長共)  오직 마음만 달과 함께 길이 남으리로다.
-이규보의 시 <달마대사상찬(達摩大師像贊)> 전문-

조선시대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생하게 기록한 ‘승정원일기’를 보면 1713년 숙종의 얼굴, 왕의 초상화를 정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일반인들의 얼굴 그려진 것을 ‘사진(寫眞)’이라고 하니 왕의 초상화는 ‘어진(御眞)’이 타당하다고 나온다.

사진은 전통 초상화 영역과 겹쳐서 인물사진으로 먼저 다가온다.
구한말 초기 사진은 초상화를 계승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보이는 그대로 기록하되, 촬영 당시 지니고 있던 인물의 내면까지 전해주는 사진을 좋아한다. 
2022년 대한민국, 사각 프레임 안에서 보여줄 수 있는 시각적 아름다움의 표현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개인이 각자 작업 중이다.

반응형

'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토제닉(Photogenic)  (0) 2022.10.09
카메라  (0) 2022.10.08
얼굴  (2) 2022.10.05
사진  (0) 2022.10.03
해상도  (0) 2022.10.02